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들의 생계문제는 당시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사회문제 중 하나였다. 1952년 통계에 전쟁미망인은 약 30만명으로 나타나는데, 50여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80%이상이 초등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75% 이상이 빈곤상태였으며 별다른 기술이나 지식, 또한 사회경험이 없었다. 이들을 위한 국가적 조치가 마련되어야 했다.
1. 추진경과
전쟁미망인에 대한 국가적 조치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미망인 가족을 위한 모자원을 설치하여 모자세대를 위한 거처를 제공함과 동시에 간단한 기능교육을 실시하여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다. 모자원의 재정은 주로 외국기관의 원조로 이루어졌는데, 각종 구호물자와 작업용 재봉기와 편물기 등이 제공되었다. 즉, 모자원에서는 양재, 미용, 이발, 수예, 편물, 원예부 등을 설치하여 기능교육을 실시하고, 취업을 알선하였다. 1956년 현재 전국의 모자원은 62개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원은 시설이 절대 부족하여 모자세대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예산 지원이 미미하여 시설이 매우 열악하였다.
모자원 외에 전쟁미망인을 돕기 위한 시설로 수산장을 들 수 있다. 수산장은 모자원처럼 주거지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생산자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 직업훈련과 판매를 위한 시설이었다.
2. 추진내용
1953년에 정부는 운크라의 예산 지원으로 수산장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부녀국 주관으로 전국에 69개소의 미망인 수산장을 설치를 계획하였고, 초기 3개월간의 운영비와 시설은 운트라의 원조로 이루어졌다. 1개 수산장에 25명씩 수용하여 6개월에서 1년간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관련해 보건사회부는 ‘전쟁미망인직업보도위원회’를 조직하여 미망인들의 직업보도 및 직업알선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각 시도에도 ‘수산장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56년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88개소의 수산장이 설치되었다. 총1,626명이 교육을 받았다. 1958년에는 재봉기 495대, 편물기 510대가 수산장에 비치되었다. 한편 부녀국은 1957년 3월 국고보조로 미망인수공예협회를 발족시켜 미망인의 자활대책을 수립하였다.그러나 이들 수산장을 설치한지 얼마 안 되어 곧 조업 중단 상태에 빠졌다. 이는 비단 미망인수산장뿐만 아니라 원호사업 차원에서 설치된 다른 수산장(1954년 현재 31개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운영상의 문제였다. 생산품의 판로를 찾지 못했거나 정부기관, 군부대 등에 물품을 공급한 후에 대금을 받지 못했다. 한때 부녀국의 국고보조로 미망인수공예협회에서 한국 특유의 수공예품을 제작하여 뉴욕의 유엔본부에 100여점의 상품을 수출한 바 있었다. 둘째는 생산한 제품이 조악하였다. 피교육생의 낮은 교육수준으로 기술 향상에 한계가 있었다.
사회부 《사회행정개요》 1954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1955~1957》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