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선, 여객선 및 화물선의 침몰원인은 각양각색이다. 가장 많은 경우가 기상악화로 인한 심한 풍랑 때문이며, 그 외의 원인은 기관고장이나 안전운항 규정 미 준수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선박들의 침몰원인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한두 가지로 그 원인을 특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1. 점보 카페리호 구조
승객과 승무원 215명을 태우고 제주를 출항, 한밤중에 부산으로 항해하던 여객선 동남상선 소속 점보 카페리호(2,904톤)가 1984년 5월 18일 23:30경 전남 거문도 동북방 4.2마일 해상에서 심한 풍랑으로 화물하역용 선수개폐문이 열려 침수하면서 기관고장을 일으켜 표류, 구명보트로 탈출하던 승객 12명이 익사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소식을 접한 해양경찰은 즉시 구난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사고현장에 경비정을 급파했다. 당시 사고해역은 폭풍주의보 발효 중으로 5-6m의 높은 파도가 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동, 새벽 3:35경에 1차 여수지구해양경찰대 소속 266함이 사고해역에 도착하여 2시간여 동안의 각고의 노력 끝에 사고선박과 동양 카페리5호 간에 생명선을 연결시키는데 성공하여 가까운 완도 근해로 예인을 시작했다. 7:00와 7:30경에 1,000톤급 경비정 2척이 추가로 도착하여 총 3척이 사고선박 호송과 실종자 수색에 임하였다. 이로써 나머지 승객을 안전하게 호송하였고 실종자 수색을 실시하여 9구의 사체를 인양하였다.
2. 월남 보트피플 구조
1987년 7월 1일 17:15경 전남 신안군 소흑산도 동남방 30마일 해상에서 월남난민 21명(남 14, 여 7)을 태운 20톤가량의 선박이 표류 중인 것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이 발견, 해경에 신고해 왔다. 이에 목포지구 해양경찰대는 즉각 인근 해역에서 경비 수행 중인 ‘지리산호’를 현지에 급파, 구조하여 7월 2일 08:00경 목포항에 무사히 예인했다.
이 난민들에 대한 해경의 조사결과, 이들은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가난과 학정에 시달리면서 인권탄압과 징병정책을 피하여 한국행을 결심하고, 베트남 탈출 1개월 전부터 은밀히 모의한 끝에 1987년 2월 26일 베트남 하이퐁항을 출항, 마카오·홍콩·상해 등을 거쳐 선상생활 4개월 만에 평소 동경하던 우리나라의 품에 안기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3.서해페리호 침몰사고
1993년 10월 10일 09:40경 전북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출항하여 격포항으로 항해 중이던 여객선 서해페리호가 10:00경 위도 동방 4.6km 해상 임수도 근해에서 심한 풍랑으로 인해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위도로 회항하려고 하였다. 선수를 돌리는 순간, 선체가 심한 너울파도에 맞아 기우뚱거림에 따라 승객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선박이 복원력을 상실, 전복·침몰하여 승선원 362명(승객 355, 선원 7) 중 292명이 사망하고 70명이 구조된 사고이다.
해양경찰청은 청장의 현지 지휘 하에 구조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헬기와 선박에 의한 합동수색체제를 구성하여 사고현장을 중심으로 동심원 수색기법에 의한 광범위한 수색에 들어갔다.
10월 11일 06:00부터 11월 2일 18:00까지 23일간 해경 경비정과 어선 등 선박 연 2,897척, 헬기 연 134대를 투입하여 해상표류사체 108구를 인양하였다. 이 수색작업에는 해경을 위시하여 육해공군의 전함과 헬기가 투입되었고, 연2,187척의 어선이 동원되었다.
10월 11일부터 10월 17일까지 해군 해난구조대원 109명과 해양경찰 특수구조단 21명 및 민간 잠수부들이 투입되어 악조건 하에 선체수색을 강행하면서 침몰선내 사체 184구를 인양하였다.
4.발해 뗏목탐사선 조난사고
뗏목으로 1,300여 년 전의 발해무역항로를 탐험하려던 탐사단원들은 2005년 2월 19일 오전 8시 러시아 포시에트항을 출항하여 항해하다가 21일 05:00경 해양경찰과의 교신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두절되었다. 높은 파도로 통신기기와 식량 등의 모든 장비를 잃은 발해호는 망망대해를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발해호와의 통신이 두절되자 해양경찰은 즉시 러시아 국경수비부에 수색요청을 하였고, 이에 러시아 경비함정 2척이 사고해역으로 출동·수색에 임하였다. 해경은 북한에도 협조요청을 하여 북한 측의 비행인가를 받아 당일 12시 30분경 비상대기 중이던 해양경찰 초계기 챌린저호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동일 오후 4시 20분경 발해호를 발견했으나, 강풍과 높은 파도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호 발견지점은 통신두절 위치로부터 62마일 떨어진 공해상이었다.
삼봉호는 22일 04:00경 탐사뗏목과 함께, 러시아 구조선(SALVAGE) 2척이 대기 중인 것을 발견하고 07:00경 구명보트를 내려 발해호로 접근, 구조작업을 무사히 끝냈다.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사고 이후 기상을 예측한 해양경찰의 신속한 대응으로 귀중한 생명을 구하였다.
동해해양경찰서 내부기록,〈발해탐사선 구조〉, 2005
해양경찰청,《해양경찰50년사》 (주)범신사, 2003
해양경찰청,《해양경찰백서》, 2006
국토해양부홈페이지
KBS뉴스, <송창언의 사건파일: 292명 목숨 앗아간 페리호 침몰>,2005.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