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이전 군인 급여는 「군정 법령」에 의거군사영어학교 학생들에게 통역관 명목으로 지급된 것이 최초였다. 그들에게는 학교가 설치될 무렵인 1945년 12월분 봉급 800원이 지급되었고 그 다음해 1월에는 물가상승을 감안하여 액수가 1,300원으로 증액되었다. 그 후 경비대 간부들의 봉급이 책정되어 지급되었으며 보급부대가 편성됨에 따라 그 생활용품이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경제의 불안정과 물가앙등으로 경비대 간부들의 생활은 봉급만으로 유지하기 곤란한 형편이었다. 미 군정에서는 잉여휴대식량인 C레이션을 경비대에 보급했는데, 이 물자를 고급하사관 이상에게 배급하여 생활에 보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압수된 금수물품을 배급하여 경비대 간부들의 생활에 보조하게 하였다.
1946년 7월 1일 통위부 내에는 보급부대가 편성되어 전체 보급을 원활하게 하였다. 보급부대는 제1연대 보급중대를 기간으로 영등포에 설치되어 미 군정에서 수입되는 장비 관리 등을 개시했다. 경비대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보급체계는 보강되어 인천에 육군 병참보급창이 설치되었고, 서울 외 대전·대구·광주·부산 지구창과 강릉·옹진에 야전창고가 마련되어 각 사단을 지원하였다.
정부수립후에는 장교들의 생활은 식생활 정도만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부대 자체로 사병들의 휴가 외출 및 외박으로 생긴 결식미를 모았다가 영외거주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경비대 간부들은 해외귀국 및 월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택을 갖지 못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 같은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경비대의 간부나 개편된 육군의 장교들은 건군의 선각자로서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했으며 계급의 승진이 수개월~6개월간으로 비교적 고속승진을 했기 때문에 그 사기는 왕성한 편이었다.
사병들의 급식도미 군정 하에서는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에는 자체 국방비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좋을 수 없었다. 주부식 외에 1일 연초 10개, 건빵, 캬라멜 등이 보급되었고, 비누와 수건 등이 지급되었다. 피복면에 있어서는 미군복으로 충당되고 있었지만, 전투복인 작업복은 원조가 부족하여 국산화로 보충하였다.
*국군의 봉급현황(1950. 6월 현재)
계 급 | 액수/한화(미화) | 비 고 | 계 급 | 액수(미화) | 비 고 |
대 장 | 30,000(33.3) | 국무위원과 동일 | 소 위 | 10,300(11.4) | 일반직 7호봉 |
중 장 | 24,000(26.6) | 차 관 급 | 준 위 | 9,900(11) | |
소 장 | 22,000(24.4) | 상 사 | 8,500(9.4) | 일반직 10호봉 | |
준 장 | 20,000(22.2) | 처 차 장 급 | 중 사 | 7,700(8.5) | 일반직 11호봉 |
대 령 | 16,000(17.7) | 일반직 1호봉 | 하 사 | 2,000(2.2) | |
중 령 | 14,700(16.3) | 일반직 2호봉 | 상 병 | 1,500(1.6) | |
소 령 | 13,900(15.4) | 일반직 3호봉 | 일 병 | 1,200(1.3) | |
대 위 | 11,900(13.2) | 일반직 5호봉 | 이 병 | 1,000(1.1) | |
중 위 | 11,000(12.2) | 일반직 6호봉 | 사관후보생 | 1,700(1.8) | |
* 1950년 6월 당시 미화 1달러는 900원이었으며, 그 무렵의 쌀가격은 1가마당 도매가격으로 17,400원 정도였다. |
국방부,《국방관계법령집》(1), 1960.
병무청,《병무행정사》(상), 1985.
국방군사연구소,《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1995.
국방군사연구소,《건군50년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