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표」(1950.1.12)로 알려진 새로운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은 극동의 정세변화를 감안한 도서방위전략이었다. 당시 미국의 도서방위전략은 전면전쟁을 상정한 전략으로서, 중국이나 한반도와 같은 분쟁지역에서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핵전력에 의한 전략공군만으로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세력의 어떠한 침공에도 이를 대응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태평양방위선을 수호할 수 있다는 전략개념이었다.
미국은 장차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경우, 그것은 미국본토와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시작될 것이며, 전쟁형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면전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대전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서유럽에서는 전략적 공세를 취하고 극동에서는 전략적 수세를 취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유럽일변도의 편중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서유럽 자유주의 제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핵무기에 의한 봉쇄정책을 대소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미국이 서유럽 편중정책에 주력하는 동안 극동에서는 중대한 정세의 변화가 태동하고 있었다. 즉 1949년 10월 1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육성하여 남침 도발의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극동에서 조성되고 있는 공산세력의 팽창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국대륙이 완전히 공산화되자 미국은 중국 불개입 자세를 표면화하여 중국은 물론이며 한반도를 거의 포기하는 듯한 정책적 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은 1950년대에 안보적 측면에서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으며,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문제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1950년 이전까지 유럽 우선정책에 치중하여 아시아 문제에는 되도록 개입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새로운 태평양방어선은 극동의 정세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전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미국은 이때 방위선을 알래스카~알류산 열도~오끼나와~류큐~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설정하여, 이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개시되자 미국은 이를 단순한 침략으로 보지 않고 소련의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자유세계에 대한 침략으로 평가하였다. 미국은 이 시기에 공산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자유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조약상 의무유무를 떠나서 즉각 군사력을 투입하여 공산제국에 명백히 각성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6.25전쟁 발발을 계기로 극동전략의 기본개념인 핵무기의 독점과 전략공군의 보유를 배경으로 한 전략을 수정하여, 알래스카~알류산열도~한국~대만~오끼나와~류큐~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미국은 아시아에서도 서유럽에서와 같은 집단안보체제가 군사전략상 불가피한 것으로 평가하고 1951년~1954년 사이 아시아 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유럽과 대등한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로써 아시아에 있어서도 북· 중·소 등 북방 3각 관계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대만 등 남방 4각관계가 형성되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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