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1. Home
  2. 기록물 열람
  3. 통합검색
  4. 분야별 검색

국방/병무

청와대습격사건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북한은 1960년대 후반 남한이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또 한·미 연합공동방위를 마련하여 국방태세를 강화하자 부쩍 조바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북한은 그동안 수행한 대남공작마저 별 성과가 없이 끝나자 급기야 국가원수 암살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북한은 대한민국 수반인 대통령을 암살 저격함으로써 일시에 남한 정부 및 사회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려 그들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무장공비의 서울 침투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집단방위체제상의 문제와 북한의 공비침투 및 대게릴라전 대비에 우리나라 국방상 커다란 문제가 대두되었다.

내용

1968년 1월 21일 북한 제124군부대 특수요원에 의해 자행된 청와대습격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 하에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1968년 1월 17일 밤에 비무장지대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북한군 제124군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였다. 이들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 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군은 즉각 제6군단장 책임 하에 군·경 합동작전으로 무장공비들을 추격 소탕작전을 펼친 끝에 동년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1명을 생포하였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하였다. 이들 무장공비가 침투한 목적은 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암살, 주한미대사관, 육군본부의 폭파,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이 사건은 유일한 생존자로 생포된 김신조의 자백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났는데, 대한민국 국가원수를 테러대상으로 삼은 사건으로서 북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폭력혁명 전략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신조는 그들의 침투한 경로를 밝히면서 1968년 1월 18일 밤 미 제2사단지역의 철조망을 뚫고 통과했으며 서울로 오는 도중 19일 파주군 삼봉산에서 나무꾼을 만난 것 외에는 검문도 받지 않고 예정 코스를 따라 왔다고 진술했다. 이는 침투에 대비한 전방부대의 배치와 수색, 경계가 평소 얼마나 소홀했는가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의의
정부는 1.21기습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공장의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대통령 특사가 2월 11일 방한하여 양국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5월 27일~28일간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가 개최되어 연례화 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이후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고,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 또한 정부정책기조를 경제개발과 동시에 자주국방의 기틀을 강화하는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참고자료

국방부 <<대비정규전사>>제2집 국방부, 1997.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 서울인쇄, 1998.
국방부 <<국방사>>제3집 국방부, 1990.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