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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KAL기 납북사건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KAL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12:25분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과 승무원 41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을 비행 중 고정간첩인 조창희에 의해 강제 납북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동 여객기가 월북한 다음날인 12일 착륙지점을 밝히지 않고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하였다. 


정부는 즉시 이러한 북한의 공중해적 행위를 규탄하고 기체와 승무원 및 승객전원의 송환을 촉구하는 한편, 국제적십자사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송환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납북행위 자체가 군사정전협정에 위반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송환교섭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내용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체와 51명의 탑승객을 감금해 놓고 미리 조작한 각본대로 대응하였다. 북한은 12월 20일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보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즉,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12월 11일 우연하게도 같은 조로 편성되어 강릉을 갔다 오게 되었으며, 이들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이심전심으로 서로 뜻이 통했기 때문에 자진 월북을 강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북한 기자들의 질문도 한결같이 월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두 조종사는 각본대로 북한 현실의 찬양과 한국 실정의 왜곡선전으로 시종일관하였다. 


1969년 12월 25일 북한 중앙통신사는 성명을 발표하여 인질외교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성명에서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십자사 제3자의 개입 없이 그들이 지정 한 미간대표들과 직접 소환교섭을 벌이자고 정치적 흥정을 제기하였다. 


그 후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승객을 송환하겠다고 국제적십자사에 송환을 통보하고 지정한 날짜가 지나도록 송환하지 않았다. 1970년 2월 14일 17:00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납북 65일 만에 다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날 39명의 귀환승객들은 20:00가 넘어 서울에 도착, 1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KAL기 납북경위와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북한은 승객들을 모두 한 사람씩 평양의 여관방에 격리 수용하고 성분 조사를 핑계로 약물마취와 전기고문을 하였으며 하루 4시간씩 강제 학습을 실시하여 세뇌공작을 했다고 하였다.


승객들은 사건 당시 항공기가 대관령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객석 앞자리에 않아있던 조창희가 갑자기 조종실로 들어간 직후부터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동해 상공에 이르렀을 때 2대의 북한 전투기가 KAL기를 호위한 것을 보고 나서야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비행기가 함흥 부근 연포비행장에 강제 착륙되었을 때 조창희가 먼저 내려 떠나는 것을 보았다.


북한은 민간항공기의 범죄적 납북을 은폐하기 위해 두 조종사에 의한 의거입북을 주장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억류함으로써 진상이 폭로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북한은 민간항공기 납치라는 반인류적·반문명적 테러를 통해 남한의 불안한 상황을 세계에 알려 한국을 고립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참고자료

국방부 <<대비정규전사>>제2집 국방부, 1997.
국방부 <<국방사>>제3집 국방부, 1990.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