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월부터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수출진흥회의>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박정희대통령은 수출증대가 현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다고 분명히 강조했다. 이후 대통령은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하며 수출을 독려·촉진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 회의를 통해 대통령은 매달 수출 목표와 진행상황을 확인하며 수출의 애로점을 시정하고 해외공관에 직접 전달되는 지시를 내렸다. <수출진흥회의>의 준비와 실무, 진행은 주무부서장인 상공부장관이 맡았다.
<수출진흥회의>는 수출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토의, 점검, 결정하였는데 산업, 거시경제가 대부분 수출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사실상 <수출진흥회의>에서는 한국경제의 모든 문제가 토의, 점검, 결정, 권고되었다. 1969년부터 정부만이 아니라 경제단체장과 대학교수, 해외공관장, 심지어는 법조계 인사도 참석대상에 포함되면서 <수출진흥확대회의>로 개칭되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77년 들어 수출 뿐 아니라 수입도 중요한 관리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로 개칭되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진행되면서 결정된 주요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1966년 11월 박대통령은 <제10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설립 검토를 지시하여 이는 「과학기술처」 설립으로 연결되었다.
나. 1970년 8월 24일 <제8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구미공단」을 전자전문공단으로 확정하였다. 또 100억 달러 수출과 중화학공업이 제기되었고 상공부의 장기수출계획(10년계획)이 확정되었다.
다. 1972년 12월 28일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1) 공산품의 총수출 비율을 1976년 90.4%, 1980년대 93%로 하고 (2) 중화학제품의 공산품 수출내 비중을 1976년 44%, 18억 3천만 달러, 1980년 60.5%, 56억 3천만 달러로 할 것을 발표했다.
라. 1973년 8월 28일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국내전자공업육성시책에 따른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100% 단독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겠다고 보고했다.
마. 1973년 11월 1일 상공부, 내무부, 농수산부 등은 공장새마을운동 전개방안을 <9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정부와 민간경제단체장 합동으로 전국 공장새마을기구를 구성하여 3단계 운동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바. 1975년 3월 31일 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의 종합무역상사육성방안을 보고받고 이를 승인했다.
사. 1976년 5월 박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종전의 무분별한 기술도입을 지양하고 꼭 필요한 기술을 도입하되 원본기술의 도입에 치중하라고 지시했다.
아. 1979년 1월 24일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10대 전략산업(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시멘트, 도자기, 섬유) 육성계획을 보고하였다.
자. 1979년 7월 12일 박태통령은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대기업 총수들에게 더 이상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수출(무역)진흥확대회의는 한국의 수출증대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2006년 무역협회는 수출 1억 달러 달성(1964년)과 <수출진흥확대회의> 개최(1965)를 한국 무역 10대 뉴스의 1, 2위 뉴스로 뽑았다. 한국은 2006년 12월 5일 세계 11번째로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 초기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은 1960-1970년대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국립공업연구소,《수출진흥확대회의》상공부, 1968.
오원철,《한국형 경제건설 7: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냐》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한국무역협회,《한국무역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