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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수출진흥(확대)회의(1965)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65년 상공부 연두순시에서 박대통령 지시
배경
1964년 이후 수출지상주의가 표명되어 이때부터 수출지향정책이 대거 시행되었다. 1964년 5월 3일 기준환율 인상과 외환증서제도가 채택되었고 5월 6일에는 「환률개정에 따른 경제시책」이 발표되었다. 6월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설치되어 구로공업단지, 부평공업단지, 주안공업단지 등 총 112만 7천평에 이르는 수출공업단지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6월 24일에는 상공부의 「수출진흥종합시책」이 발표되어 수출목표 105백만 달러를 120백만 달러로 상향하고 수출산업육성, 수출 세제지원 및 보상제도 확충이 이루어졌다. 9월 14일에는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만들어지고 9월 16일에는 「수출진흥기금 운용규정」이 발표되어 수출진흥기금이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10월 5일 대통령은 자립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제1과제가 바로 수출진흥을 통한 외화 획득이며 경제시책의 중요한 목표를 ‘수출제일주의’로 삼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모든 정부의 정책은 수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적극적인 수출지향정책으로 1964년 12월 5일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했고 이를 기념해 대통령은 이 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했다. 1962년 수출은 5,700만 달러, 1963년은 8,300만 달러였지만 1964년 12월 31일에는 수출이 1억 2,000만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이후 일관되게 수출을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고 박정희대통령은 1965년 연두교서에서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3대 시책지향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에 따라 1965년은 다시 본격적인 수출의 해로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상공부 초도순시에서 수출의 애로점을 시정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개최할 것을 지시했다.
내용

1965년 1월부터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수출진흥회의>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박정희대통령은 수출증대가 현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다고 분명히 강조했다. 이후 대통령은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하며 수출을 독려·촉진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 회의를 통해 대통령은 매달 수출 목표와 진행상황을 확인하며 수출의 애로점을 시정하고 해외공관에 직접 전달되는 지시를 내렸다. <수출진흥회의>의 준비와 실무, 진행은 주무부서장인 상공부장관이 맡았다. 


<수출진흥회의>는 수출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토의, 점검, 결정하였는데 산업, 거시경제가 대부분 수출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사실상 <수출진흥회의>에서는 한국경제의 모든 문제가 토의, 점검, 결정, 권고되었다. 1969년부터 정부만이 아니라 경제단체장과 대학교수, 해외공관장, 심지어는 법조계 인사도 참석대상에 포함되면서 <수출진흥확대회의>로 개칭되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77년 들어 수출 뿐 아니라 수입도 중요한 관리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로 개칭되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진행되면서 결정된 주요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1966년 11월 박대통령은 <제10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설립 검토를 지시하여 이는 「과학기술처」 설립으로 연결되었다.


나. 1970년 8월 24일 <제8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구미공단」을 전자전문공단으로 확정하였다. 또 100억 달러 수출과 중화학공업이 제기되었고 상공부의 장기수출계획(10년계획)이 확정되었다.


다. 1972년 12월 28일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1) 공산품의 총수출 비율을 1976년 90.4%, 1980년대 93%로 하고 (2) 중화학제품의 공산품 수출내 비중을 1976년 44%, 18억 3천만 달러, 1980년 60.5%, 56억 3천만 달러로 할 것을 발표했다.


라. 1973년 8월 28일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국내전자공업육성시책에 따른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100% 단독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겠다고 보고했다.


마. 1973년 11월 1일 상공부, 내무부, 농수산부 등은 공장새마을운동 전개방안을 <9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정부와 민간경제단체장 합동으로 전국 공장새마을기구를 구성하여 3단계 운동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바. 1975년 3월 31일 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의 종합무역상사육성방안을 보고받고 이를 승인했다.


사. 1976년 5월 박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종전의 무분별한 기술도입을 지양하고 꼭 필요한 기술을 도입하되 원본기술의 도입에 치중하라고 지시했다.


아. 1979년 1월 24일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10대 전략산업(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시멘트, 도자기, 섬유) 육성계획을 보고하였다.


자. 1979년 7월 12일 박태통령은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대기업 총수들에게 더 이상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수출(무역)진흥확대회의는 한국의 수출증대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2006년 무역협회는 수출 1억 달러 달성(1964년)과 <수출진흥확대회의> 개최(1965)를 한국 무역 10대 뉴스의 1, 2위 뉴스로 뽑았다. 한국은 2006년 12월 5일 세계 11번째로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 초기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은 1960-1970년대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참고자료

국립공업연구소,《수출진흥확대회의》상공부, 1968.

오원철,《한국형 경제건설 7: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냐》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한국무역협회,《한국무역사》, 2006.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