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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북한의 땅굴 구축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된 것은 1974년부터이다. 북한이 지상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잣은 노출과 피해를 입자 지하로 침투하려는 전술을 병행했다. 귀순한 김부성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 땅굴을 파기 시작했으며, 총 17개로 추정되는 대남 침투용 땅굴 가운데 4개가 발견되었다.

내용
1) 제1땅굴의 발견
1974년 11월 15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고랑포 동북방 국군 제25사단 지역에서 구정섭 중사를 비롯한 10명이 경계초소 진입 중 땅굴을 발견했다. 이 땅굴에 대해 북한 측이 공동조사에 응하지 않자 유엔군 측은 단독으로 조사했다. 11월 20일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조사반 요원이 땅굴 규모 및 증거품 수집을 위해 현지 조사 중 북측이 땅굴 내 은밀히 설치해 놓은 폭발물로 인해 유엔군사령부 공동감시팀의 로버트 볼린저(Robert M. Balinger) 미 해군 중령, 군사정전위원회 김학철 해병 소령 등 2명의 장교가 순직하고 5명이 부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였다.

2) 제2땅굴과 제3땅굴의 발견
우리 군 당국은 제1땅굴 발견 이후 또 다른 땅굴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땅굴탐색작전을 계속했다. 그 결과 1975년 3월 19일 제1땅굴에서 47㎞ 떨어진 철원 북방지역에서 제2땅굴이 발견되었다. 땅굴의 길이는 중앙 군사분계선에서 추리 측으로 이미 1,100m나 추진된 것이었다. 이미 1973년 11월 하순 전방 경계근무 중이던 제6사단 병사 2명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알 수 없는 폭음이 일정하기 들이자 이를 보고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에 우리 군이 1975년 3월 1일 역갱도 공사를 착수하였고, 그 과정에서 4월 8일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사단수색대 김호영, 김재대, 이현기 등 8명이 안타깝게 희생되었다.


특히 제2·제3땅굴은 폭, 높이가 2미터가 넘어 병력이 2열종대롤 침투가 가능할 정도였다. 제3땅굴로 명명된 판문점 땅굴은 판문점 공동감시구역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지원하는 유엔군 전진기지인 켕트 키터호크 기지로부터 2㎞ 떨어진 지점으로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이다. 제3땅굴의 침투능력은 시간당 약 20,000명이며 정규전과 비정규전 침투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제3땅굴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1978년 10월 27일 제391차 회의에서 유엔군 측이 땅굴은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비난하자 북한 측은 오히려 날조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한 일조국교정상화국민회의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땅굴을 판 목적이 침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동란이 일어날 때 애국자들을 북으로 피난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땅굴을 구축한 사실은 시인하였으나 피난용이나 관개용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3) 땅굴발견의 의미
이렇게 거듭된 땅굴의 발견으로 그동안 북한이 줄곧 주장해 온 평화공세가 완전히 거짓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남전략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언론은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북한과의 대화·교류를 성사시키고  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염려해 쌀이나 전력을 도와 줄 길을 찾고 있던 남쪽으로서는 북쪽의 명백한 그 의도 앞에 분노와 배신감에 앞서 실망과 처연한 심정을 가라앉히기 어렵다”고 개탄했다.

참고자료
신오성,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국방군사연구소, 19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 4》, 2002.
국방군사연구소, 《대비정균전사 2》, 1998.
조성훈, 《대남도발사》, 백년동안, 2015.

근거
1974년 11월 15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고랑포 동북방 국군 제25사단 지역에서 구정섭 중사를 비롯한 10명이 경계초소 진입 중 북한군의 제1땅굴을 발견했다.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
최초 주제 집필
2015. 11. 19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