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거주 교포문제에 관한 대책> (1986.2.8.)
<조총련 동포 모국방문(모방) 사업 개선> (1991.10.28. 외무부)
분단된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냉전 구조의 고착은 공산권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외동포들과의 교류와 방문을 사실상 어렵게 하고 있었다. 강제동원 당시 일본령이었던 사할린에 있었던 43,000명의 한인들은 소련과 미수교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국내법(반공법, 국가보안법)에 의해 한국으로의 입국이 금지되었다. 이들 대부분의 고향이 남한이고 이주 1세대가 고령화되면서 인도적 차원에서 모국방문을 허용하자는 움직임이 1972년 미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촉발된 데탕트의 시작과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이 마주한 남북조절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면서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국교가 없던 상태에서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사업은 대한적십자사가 맡게 되었다. 물론 첫 관심은 1956년부터이나 실제적으로는 1984년이 되어서야 제한적 ‘일시 모국방문’이 성사되었다. 반면,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사업은 민단과 일본 내 총영사관의 협조로 1975년 추석성묘단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 3월 사단법인 재일동포모국방문추진위원회(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창립되고, 그 이듬해인 1977년 3월 28일에는 해외동포모국방문후원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사업의 지체 이유는 ‘73년 남북대화의 결렬, ’74년 재일동포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여사 피격 사건 등에 따른 외부적 요인었다.
재외동포의 모국방문사업은 국교가 없거나 사상 등의 이유로 대부분이 남한 출신인 소련령 사할린 지역의 동포와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동포에게 일시적 모국 방문을 허용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적 조치이다. 모국방문단 사업은 남과 북의 체제 경쟁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1969년 이후, 남한 경제가 북한을 추월하고, 1972년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속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대한민국 정부는 특히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에게 발전된 모국을 직접보고 느껴서 재일동포 사회의 분열을 해소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75년 9월 15일 재일동포 1진 1천여명이 추석 고향방문단의 이름으로 입국하여 재일동포 사회는 물론 한국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왔다. 한식과 추석에만 국한되었던 모국방문사업은 1991년 한국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변화한다. 사업실시 기간을 연중으로, 모집대상을 소규모로, 사업 내용을 3박4일 단체 일정 후 해산하여 고향이나 연고지를 방문하도록 한 것이다. 사실상 제한적이지만 자유화를 한 것이다.
반면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은 3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1단계는 1984년부터 수교 전인 1991년까지는 먼저 일본에서 남한 가족과 상봉하는 것이었다. 일시적 모국방문은 2단계(1988-‘89)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의 해빙 분위기에서 일본 방문한 사할린 한인에게 한국을 방문토록 허용한 것이다. 사실상 모국을 방문하는 ’사할린 한인단체 모국방문‘ 사업은 1989년 9월 시작되어 현재 영구귀국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혜경, 「대한적십자사 소장 사할린 한인 관련 문서를 통해 본 '일시모국방문'(1980~1990년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12, 2022.
조일제, 「조총련계동포 모국방문사업의 시말서」, 『북한』 8, 1985.
김성희, 「1970년대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에 관한 정치사회학 연구」, 『서울대석사학위논문』 2011.
<대한적십자사 소장 사할린 한인 관련 자료(비공개 자료)> (대한적십자사 소장, 1980~1999)
외교부 Open Data (https://opendata.mofa.go.kr/mofadocu/resource/Document/63988.page)
대한적십자사 사할린동포지원 (https://www.redcross.or.kr/business/sakhalin_support.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