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장정(電報章程)」(1888. 5. 제정)
19세기 후반에 들어 근대적 통신제도가 전파되었으며, 우정총국을 기점으로 근대 우편제도가 실시되었다. 전신 서비스는 다양한 근대 통신제도 중 우편보다 빠른 신속성을 강점으로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1885년 조선과 청국 사이 체결된 ‘의주전전합동’을 통해 한성을 중심으로 인천과 의주를 연결하는 전신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을 경유하여 세계 각국과 전신으로 통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87년에는 한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독자적인 전신선로인 남로전선에 착수하며 전담 관서인 조선전보총국을 신설하였다. 이후 모사전신, 텔렉스 등 기술 발전을 통해 정보화의 기틀이 되었으나, 통신기술의 발달과 사용량 감소로 2024년 2월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전신 서비스
전신은 전기 신호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주고받는 통신 기술이다. 문자나 부호를 먼 거리로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이 기술은, 전선을 사용하는 유선전신과 전자기파를 사용하는 무선전신으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문자나 기호를 단점(⦁)과 장점(—)의 조합으로 보내는 모스 전신으로 시작했다. 전신을 사용해 문서를 배달하는 서비스를 전보라고 하며, 기술 발전에 따라 모사전신(팩시밀리)과 가입전신(텔렉스) 같은 현대적 서비스로 확장되었다.
한국 전신의 역사
1885년, 조선은 청국과 ‘의주전전합동’을 체결하며 한성 북부 돈의문에서 의주 설유정에 이르는 1,053리의 전신을 가설했다. 평양과 의주에는 전보분국이 설치되었으며, 한성을 중심으로 인천과 의주를 연결하는 서로전선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조선은 중국을 거쳐 유럽과 전신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신과 관련된 규정
최초의 전신법규는 1888년 조선전보총국 업무 개시 전에 제정된 전보장정이다. 전보장정에는 32항의 조문과 함께 요금 및 전신부호를 규정했으며, 여기에서 규정된 한글 전신부호는 현재까지도 사용 중이다.
기술 발전과 서비스 도입
1959년 12월, 서신·서류·도면·사진 등을 원형 그대로 복사·전송하는 모사전신(팩시밀리) 서비스가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서울-부산, 서울-대전, 서울-대구 간에 각 1회선씩 설치되었다. 1963년 3월, 가입전신(텔렉스) 서비스가 서울-도쿄 사이에 준공·개통되었다. 가입전신은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와 교환장치를 사용하는 서비스로, 현재의 컴퓨터·인터넷 교신의 원형이 되는 서비스이다. 1965년 12월에는 국내 가입전신이 개통되었고, 교신 지역은 62개국으로 확대되었다.
전신 문화와 생활 속 흔적
전신 서비스는 그 기술적 한계로 인해 긴 내용을 주고받기 어려웠다. 이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글자 수)에 따라 기본요금 외에 추가 요금이 부가되었다. 요금을 절약하기 위해 내용을 축약하거나 줄임말을 만드는 문화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내려오라"는 내용은 ‘조모위독급래고대’와 같이 전송했다.(최명희, 『혼불』 중) 우리의 일상 용어 속에서도 전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쁜 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축전’은 원래 전신으로 보내던 축하 전신에서 유래되었다. 전신 신호를 송수신하기 위해 전선을 걸었던 기둥의 이름인 전봇대 또는 전신주는 이후 전기, 전화, 인터넷 등 다양한 인프라의 기반이 되는 시설이 되었습니다.
전신 서비스의 종료
전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실시간에 가까운 원거리 통신으로, 현대 통신 기술의 토대가 되었다. 통신 기술의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 나아감에 따라, 전신은 텔렉스에서 다시 데이터 통신으로, 컴퓨터 통신으로 발전하며 전기통신 전 분야에서 혁신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전신 사용률은 통신 기술의 발전과 개인용 통신기기의 보급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특정 영역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던 전신 서비스는 한성전보총국이 서울과 인천 사이에서 전보를 처음 보낸 지 138년이 지난 2024년 2월,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최명희, 『혼불』, 매안, 1996
우정사업본부, 『한국우정 130년사』, 2014
서울체신청, 『서울체신청백년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