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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우정요원 양성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체신제학교설치령(대통령령 제1294, 1957. 7. 10. 시행)

체신제학교설치령(각령 제208, 1962. 1. 1. 시행)

공무원훈련법(법률 제1350, 1963. 5. 31.)

체신공무원훈련소직제(대통령령 제1954, 1964. 10. 7. 일부개정

배경

우정요원 양성은 조선 후기 근대 통신기술의 도입 필요성에 따라 시작되었다. 근대 통신기술은 1860년대 최한기의 신기천험, 김기수의 일동유기등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1885년 조선전신수기학교 설립으로 본격적인 우정인력 양성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일통신협정 이후 통신 체제가 식민지 체제로 재편되며 새로운 통신 서비스 도입과 함께 전문 인력의 필요성이 급증했다. 광복 후에는 훼손된 통신시설을 복구하고 기술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경과

1885년 조선전신수기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전보학생과 실무 견습생 제도가 운영되며 통신 인재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00년 우무학당과 전무학당이 설립되며 체계적 교육이 시작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체신이원양성소와 조선무선통신학교가 설립되어 우정 및 통신 인력 양성이 이어졌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체신학교를 중심으로 단기 교육과정을 통해 독자적인 통신망 운영 능력을 확보했다. 1962년 체신공무원교육원이 설립되었고, 1984년 정보통신훈련센터가 설립되며 정보화 사회를 대비한 전문인력 양성이 강화되었다. 1998년에는 글로벌 IT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한국정보통신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KAIST와 통합되어 그 역사를 이어갔다.

내용

우정요원 양성의 역사

우정요원 양성의 역사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에 시작되었다. 1866년 최한기의 신기천험에서 전신과 해저전신 등 근대 통신기술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며, 1884년 고종의 명으로 김학우가 일본에 파견되어 전신 개설과 인력 양성을 도모하려 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무산되기도 하였다.

근대 통신기술의 도입을 위해 일본 전신수기학교를 모델로 하는 조선전신수기학교가 1885년에 설립되었고, 7명의 전수생을 양성하며 우정요원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85년 도입된 전신은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에서는 난해한 기술이었다. 이에 따라 전문성을 갖춘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전보학생, 전보학원, 전보학습원, 전무학도 등 여러 이름으로 실무 견습생 제도를 운영하며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0011, 통신원은 우무학도규칙전무학도규칙을 제정하며 우무학당과 전무학당이라는 두 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 전문 교육기관이자 최초의 관립 실업학교로서, 통신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한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영국의 해래백사(Thomas E. Hallifax), 미국의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프랑스의 길맹세(Clémencet), 덴마크의 미륜사(J. H. Mühlensteth) 등의 외국인 교수진을 초빙해 인력을 양성하였다.

 

일제강점기 시대

일제는 1910년 한일통신협정 이후 한국의 통신시설을 강탈하고, 통신 기관을 식민지 체제로 재편했다. 이 시기, 일본은 우편, 전신, 전화, 우편환, 우편저금제도 등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며 통신 기관을 급격히 확장했다. 이러한 확장 정책에 따라 운영인력 확충이 시급해졌고, 191310체신업무전습생양성규칙을 제정해 임시 사무원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어 19181, 본격적인 통신 인력 양성을 위해 체신이원양성소를 설치하여 우정 및 통신 분야의 전문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항공기와 선박의 증가, 산업개발 지역의 확장으로 무선통신 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404월 사립 조선무선통신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조선무선통신학교는 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고등교육을 제공했으나, 한국인 본과 졸업생은 22명에 불과했다. 비록 소수였지만, 이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무선통신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19444, 조선무선통신학교는 관립으로 전환되어 조선총독부 산하 교육기관인 관립 무선전신강습소로 개편되었다.

 

광복 직후 체신 분야의 과제와 교육의 발전

전쟁과 점령으로 훼손된 시설을 복구하고 유지하는 것은 광복 직후 체신 분야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기술·운영인력의 빠른 확보가 필요했다. 초기에는 현장교육을 통해 부족한 기술요원을 보충했으며체신이원양성소를 대신해 조선체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체신학교의 교육 과정은 주로 3~12개월의 단기 교육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시급한 인력양성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광복 3년 후에는 우리 기술자들이 통신시설을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후 조선체신학교는 체신대학과 체신고등학교를 병설해 전문교육을 제공하며 중견 간부 양성에 기여했다. 또한 흥국공업초등학교를 신설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체신 종사원의 자녀들에게 중등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설립된 무선전신강습소는 광복 후미 군정청이 인수했으며, 이후 조선체신학교로 이관되어 체신부 교육기관의 일원화를 추진했다. 19463, 무선전신강습소는 무선전문학교로 새롭게 출발했으나미군정의 예산 부족과 당시 실정에 맞는 실제적 기술 습득의 필요성을 이유로 폐교 결정이 내려져 개교한 지 2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체신학교의 폐지와 체신 교육기관의 발전

1961,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지시에 따라 문교부 소관이 아닌 학교들은 원칙적으로 폐지되었고체신학교도 이에 따라 문을 닫았다.

19621, 신규 채용자와 재직자를 대상으로 한 체신공무원교육원을 설립했다. 이어 1964년에는 UN 특별기금의 지원으로 전기통신기술원훈련소를 운영하였으며, ITU(국제전기통신연합)의 주관 아래 1,494명이 교육을 수료했다. UN의 지원 종료 후, 19702 두 교육기관은 통합되었다. 19821, 한국통신의 발족으로 전기통신사업이 분리되면서 체신공무원교육원은 체신부 산하에 남고, 전기통신 분야 전담 교육 기능은 한국통신연수원으로 분리·개편되었다.

첨단 교환방식인 전자교환기가 도입되면서 체신부는 급증하는 기술인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198411, 공익법인으로 정보통신훈련센터를 설립했다. 정보통신 전문인력 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컴퓨터 비전공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6개월 전산전문요원 과정이 큰 인기를 끌었다. 6개월 장기 전산교육과정 모델은 기업체와 대학의 전산교육센터에 영향을 미쳐 다수의 과정이 개설되었고, 단기간에 다수의 전산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글로벌 IT 인재 양성과 현재
정보통신훈련센터는 19881월 재단법인 정보문화센터로 확대·개편되었다. 19922월에는 전산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국정보문화센터로 법정법인화되었다. 한국정보문화센터는 이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정보문화 확산과 전문인력 양성, 정보화 격차 해소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한국정보문화진흥원은 2009년 한국정보사회진흥원과 통합되어 한국정보화진흥원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습니다.

1998, 정보통신부는 정보화 사회에 대비해 글로벌 IT 인재 육성을 목표로,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ICU)를 설립하였다. 2002년에는 학사 과정인 한국정보통신대학교가 개교했으며, 2004년에는 대학원대학교와 통합했다. 2009, 운영 주체와 법적 근거 문제로 인해 한국정보통신대학교는 KAIST와 통합되었다.

체신공무원교육원은 이후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우정공무원교육원으로 개칭을 거쳐 현재의 우정인재개발원으로 자리잡았다. 우정인재개발원은 우정분야 인력의 재교육을 전담하며, 국민들에게 최고의 우편, 예금,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참고자료

우정사업본부, 한국우정 130년사, 2014

국립체신고등학교사 편찬위원회, 국립체신고등학교사, 2010

집필자
주영광(한국우편사업진흥원 전임연구원)
최초 주제 집필
2024. 12. 24
최종 주제 수정